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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임마누엘 한국학교 “우주반 글 모음”
‘가장 뜨겁고 따뜻했던 한국에서’ 글: 조하은 필라델피아 임마누엘 한국학교
6월이다. 따가운 햇빛이 팔을 간질거리고 물놀이가 생각날 때면 4년전 아프리카보다도 더 뜨거웠던 7월의
한국이 생각난다.
어 설 픈 한 국 말
한국에 도착하고 일주일 정도 지난 후였던 거 같다. 미국에 2년 정도 공부하다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와 한국말로 카
톡을 주고받았는데 엄마가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깔깔’ 웃으셨다. 친구가 ‘잠은 잘 잤어?’라고
물어봤는데 ‘시체 적응은 잘한 거 같아’라고 답을 했다.
‘시차’라는 단어를 많이 들었는데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것이다. 완전히 다른 단어라는 것을 알고 놀란 나에게
엄마는 ‘아마 친구가 오타라고 생각할 거야’라고 안심시켜 주셨다. 친구가 진짜 오타라고 생각했을까 지금도 궁
금하긴 하다. 엄마가 알려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시체 적응’으로 말하고 다녔을 것이다.
나 는 어 느 나 라 사 람 이 야 ?
한국에서 외갓집에 주로 머물렀다. 외갓집에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사촌동생이 있다.
사촌동생은 친구들에게 미국에서 사촌언니가 온다고 얘기했고 드디어 놀러 온 사촌동생 친구들과 만나게 됐다.
미국에서 한국학교를 다니고 집에서도 한국말만 쓰고 있었기에 한국말을 한다는 건 나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사촌동생 친구들은 한국말만 하는 미국 사촌언니가 이상했는지 ”언니는 미국 사람인데 왜 한국말을 잘
해?”라고 의아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또 외갓집에 오고 나서 며칠 동안 외할아버지는 사촌언니와 동생이 있는 자
리에서“영어로 말해봐라. 영어 좀 배우게.”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던 나는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엄마에게 얘기했다. “엄마,
나는 미국 사람이야? 한국사람이야? 미국에서는 영어를 해도 나를 한국사람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나를 영어
하는 미국 사람으로 생각하잖아.” 혼돈스러운 마음에 많이 울었던 거 같다. 한국에서 내가 미국사람으로 사람들
이 생각할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는 “너는 한국사람이고, 미국 사람이기도 해. 코리안 아메리칸이고, 아메리칸코리안이야. 이건 이상한
일도 아니고 너만 그러는 것도 아니야. 그리고 네가 이 두 나라를 잘 알고 두 가지 언어를 하면 친구들도 더
많이 사귀게 되고,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는 역할도 할 수 있어. 사람들은 네가 한국어도 영어도 잘하니 신기
하기도 하고, 얘기가 안 통할 수도 있어 걱정했는데 한국어를 잘하니 좋아서 그런 거야”라고 나를 달래주셨
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시간이었던 거 같다.
작 년 에 한 국 학 교 에 서 1 0 년 개 근 상 을 받 게 되 었 다 . 3 살 반 부 터 다 닌 한 국 학 교 에 서 1 0 년 을 개 근 했 다
생 각 하 면 지 금 도 뿌 듯 하 다 . 그 리 고 한 국 말 을 이 만 큼 할 수 있 는 나 를 칭 찬 해 주 고 싶 다 .
뜨 끈 한 바 닷 물
외갓집 식구들과 서해안으로 여행을 갔다. 37도를 넘는 날씨를 피해 에어컨이 있는 펜션에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아이들은 숨이 막히는 한낮을 피해 해가 질 저녁 무렵 바닷가에 가서 물놀이를 하기로 했다. 시원하고 차갑다고만
생각한 바닷물이기에 더운날 너무 시원할 거 같았다. 그런데 바닷물은 누가 뜨거운 물을 부은 것 마냥 뜨끈했다.
바닷물이 아니라 온천에서 수영하는 기분이었다. 학교에서 바닷물의 온도가 올라가면 생기는 일에 대해 배웠
던 것이 문득 생각이 났다.‘물이 불어나고 바닷물의 높이가 올라가면 빙하도 녹고, 산호들도 죽는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사람들도 살 곳이 없어진다고 했는데….’ “엄마 엄마, 여기 바다에 있는 조개랑 물고기들은 지금 괜
찮을까?” 걱정하며 엄마에게 물어봤던 생각이 난다. 그 후 바닷가에 갈 때면 그날 느꼈던 걱정이 떠오른다.
할 머 니 의 피 난 길
한국 방문 중 외할머니의 팔순잔치가 있었다. 가족들이 다 모였는데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친척들이 더
많이 있었다. 처음 만난 친척들도 나를 반겨주고 안아주었다.
팔 순 잔 치 며 칠 전 엄 마 에 게 외 할 머 니 의 피 난 이 야 기 를 들 을 수 있 었 다 . 외 할 머 니 는 이 북 신 의 주 에
서 태 어 나 셨 는 데 한 국 전 쟁 이 일 어 나 고 가 족 들 과 피 난 길 을 떠 나 셨 다 고 한 다 . 달 빛 도 없 던 캄 캄 한
한 밤 중 에 피 난 을 도 와 주 는 사 람 을 따 라 며 칠 밤 낮 을 숨 어 걸 었 고 , 몇 달 은 산 속 에 서 칡 뿌 리 를 먹
으 며 숨 어 지 냈 다 고 한 다 . 나 중 에 는 부 산 으 로 그 리 고 제 주 도 까 지 피 난 을 내 려 가 셨 다 고 한 다 . 피 난
내 려 올 때 외 할 머 니 의 큰 언 니 는 출 산 을 얼 마 남 겨 두 지 않 았 던 터 라 같 이 피 난 을 내 려 오 시 지 못 했
다 고 했 다 . 얼 마 뒤 에 는 다 시 만 날 것 이 라 생 각 하 면 서 말 이 다 .
팔 순 잔 치 에 오 신 외 할 머 니 의 형 제 들 을 보 니 캄 캄 했 던 어 느 날 밤 엄 마 에 게 업 혀 서 아 빠 와 언 니 의
손 을 잡 고 잡 혀 갈 까 봐 굴 러 넘 어 져 도 울 지 도 못 하 고 앞 이 보 이 지 않 는 길 을 한 걸 음 한 걸 음 내 디
뎠 을 어 린 아 이 들 의 얼 굴 이 보 였 다 . 얼 마 나 무 서 웠 을 까 , 얼 마 나 힘 들 었 을 까 , 얼 마 나 보 고 싶 었 을
까 ! ‘ 나 였 다 면 그 캄 캄 한 길 을 잘 지 나 왔 을 까 ? ’ 그 길 을 걸 어 나 와 이 자 리 에 계 신 분 들 이 대 단 해
보 였 다 .
올 여 름 방 학 에 4 년 만 에 다 시 한 국 을 방 문 할 계 획 을 세 우 고 있 다 . 코 로 나 가 막 아 놓 았 던 길 이 었 는
데 다 시 갈 수 있 다 생 각 하 니 가 슴 이 두 근 댄 다 . 하 얀 도 화 지 에 아 크 릴 물 감 을 섞 어 칠 할 때 의 설
렘 같 다 . 이 번 에 는 어 떤 사 람 들 과 어 떤 일 을 또 어 떤 나 를 만 나 게 될 지 정 말 기 대 된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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